범룡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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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이 마지막 날… 마지막 날이 첫날이지
범룡스님
소년의 꿈은 세계일주였다.
준마처럼 만주며 연해주를 누비고 싶었다.
그러나 제 땅조차 마음놓고 밟기 힘든 일제 치하.
소년의 아버지는 잔뜩 웅크리고 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다.
“예로부터 세상엔 네 가지 얻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대장부가 되기 어렵고 출가의 인연을,
부처님 말씀을 만나기가 어렵다(四難得).” 진심어린 충고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입산(入山). 소년은 천하 대신 마음을 주유했다.
전조계종 전계대화상 범룡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스님의 방엔 큼지막한 세계지도와 전국지도가 나란히 붙어있다.
몇 안 되지만 자신이 가본 나라를 하나하나 짚어보는 스님은 추억에 잠긴 눈치다.
“여행가가 되는 게 나았을지 수행자로 남은 것이 다행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네.”
물론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수행자로 남았기에 평생 죄짓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것. “젊은 시절, 힘깨나 써 군인 가면 거뜬히 대장이 될 거라고 추켜세우고들 했어요. 그러면 미련없이 대답했지.
대장 자리까지 오르려면 젊은이들끼리 싸움을 붙여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여야 하겠소. 난 늘 성불할 길, 부처님편에 서서 영원히 함께 있을 거요.”
세수 92세. 대부분의 기억이 산화했지만 선친의 격려는 바로 어제 일처럼 애틋하다. 걸출한 서예가였던 부친은 자주 편지를 보내 아들의 근황을 물었다.
“常思, 雌鷄伏卵未離窩 實行, 人能十之 已能百之
(항상 생각하기를, 암탉이 알을 품으면 절대 둥지를 떠나지 않는 것같이 하고,
행하기를 남이 열을 할 수 있을 때 너는 백을 하라).”
스님은 이 서간을 정말 ‘닭이 알을 품듯’ 애독하는 〈대방광불화엄경〉 갈피에 끼워놓고 지금껏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무서운 치열함으로 무(無)자 화두를 들었다.
비로소 육체와 마음이 단박에 청정해지는 삼매를 경험했다.
“믿음이 크면 의심도 크기 마련이죠.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참구하면
이르지 못할 깨달음은 없습니다.
경전에 마음을 비추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경전을 읽어도 소용이 없어요.”
스님은 “경전에서보다 사람에게서 부처님을 자주 봤다.”
“아버지와 같은 분을 못 만났더라면 이렇게 좋은 날도 없었을 거예요.”
출가사찰은 금강산 유점사. 명산의 아름다움에 눌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은사는 만허스님이다.
“우리 스님은 유명한 도인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심덕이 따뜻해서 상대방이 이야길 하면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일단 끝까지 다 들어줘요.
그게 참 고맙더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은 당시 이름난 선지식이었던 한암스님을 찾아가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로 발길을 돌렸다.
스님은 딴에 은사스님이 무척 서운해 할 거라 여겨 특별히 하직을 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의 속내를 읽은 스승은 일주문앞까지 따라나와
“중노릇을 하려면 한암스님 만큼만 하면 된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가슴에 아로새긴 또 하나의 생생한 추억이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스님은 자신을 결코 내세우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내 식대로 판단하면 늘 틀릴 수밖에 없더군요.”
곁에서 뵌 한암스님도 만허스님 못지않은 ‘대덕(大德)’이었다.
처음엔 “성격이 괴팍하고 신경질적”이라는 악평도 들려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직접 만나봤을 때 항간의 악평이 완벽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문학에 달통한 강백이었던 한암스님은 붓글씨도 빼어났어요.
사람이 한두 가지 잘 하긴 쉬워도 열 가지 두루 잘 하긴 힘들거든요.”
무엇보다 스님이 감동한 것은 한암스님의 착한 마음씨다.
“스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엔 제자에 대한 사랑이 넘쳤어요.
늘 스스로 깨우치도록 따뜻하게 지켜봐 주셨습니다.
계행이 철저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생각했죠.”
스님의 계속된 칭송에 “한암스님이 그렇게 심성이 고운 분이었느냐”고 되물었다.
“그럼요, 선지식인데.”
스님의 짤막한 말은 깊게 울렸다.
“선지식(善知識)은 착한 사람입니다.
남을 나처럼 여기는 사람입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거나 꿈을 깨지 않습니다.
자기의 길로 제자를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의 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스님의 고언에 ‘나’의 행복에 짓눌린 ‘남’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지 곱씹게 됐다.
부친도 만허스님도 한암스님도 ‘나룻배’와 같은 존재였다.
스님은 ‘행인’으로서 이들의 도움을 받아 피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분들에게 부끄러운 아들이나 제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이 열의 선행을 행할 때 백의 선행을 했다.’
“태평양전쟁으로 아시아가 쑥대밭이 됐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전쟁을 일으킨 걸 무척 후회한다죠.
무수한 인재를 전쟁에 동원해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최강대국이 됐을 거라고.
내가 부처면 다른 사람도 부처입니다.
남을 해친다는 건 망상입니다.
사실 자신을 해치는 거예요.”
한번은 절에 어느 스님이 찾아왔을 때
당신이 “어느 스님 상좌요?”라고 묻자 “스님 상좌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만큼 많은 제자를 키워냈다.
“그저 부처님 말씀을 베끼기만 했지. 내가 지은 말은 하나도 없어요.”
스님의 가르침은 단출하다.
“스님으로 공인할 때 왜 계를 줍니까.
누구보다 앞장서 계율(戒律)을 잘 지키라는 뜻이에요.
부처님도 열반할 때 자신 대신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 했습니다.
계율은 생명의 길이요 삶의 질서를 유지케 하는 원동력입니다.
살생이나 도둑질이나 내 몸을 망치고 전체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시대에 따라 계율도 재해석해야 한다는데
그렇다면 현대에는 질서를 파괴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스님의 얼굴엔 황혼이 깊게 들이쳤다.
장군감이었던 청년시절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낮게 푸석거렸다.
바깥출입도 삼가는 편이다.
그러나 볕이 좋으면 텃밭에 나가 호미질을 하다가 해질녘 들어오기도 한다.
자연이 그날그날 내놓는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나온 스님은 걷지 않고 걸었다.
마치 흐르는 나무같다.
스님의 ‘강력한’ 순응은 단순히 쇠잔한 기력 탓은 아니다.
스님은 지금도 3시간 이상을 자지 않고 참선과 간경에 전념한다.
70년을 이어온 삶의 방식이다.
여행가와 수행자.
스님은 후자를 선택했고 그 선택에 온몸을 던졌다.
“깨달음이 있긴 뭐가 있어요.
첫날이 마지막날이고 마지막날이 첫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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