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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스님─기도의 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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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달마사
댓글 0건 조회 670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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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께 백일기도하고 눈 뜬 중년신사
(법철스님글 전재)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향가 가운데 도천수대비가를 조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관음전에 비옵나니, 천수(千手), 천안(天眼)의 그 중 한 눈, 눈 먼 저에게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옵시면 자비 더욱 크오리다.’

향가를 통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중생이 슬픔속에 관음보살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만산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우는 화창한 봄 날. 산새소리 가득한 강진 무위사에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다.

필자는 그때 무위사 큰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고목나무 밑에 놓여 있는 깨어진 멧돌 위에 정좌하여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남자는 필자에게 정중히 합장 인사를 하고는 어눌한 음성으로 무위사에 관세음보살님의 국보 벽화가 봉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왔으며 관음기도를 지성껏 모셔보고 싶노라고 허락을 구해왔다.

그는 슬픈 얼굴로서 후리후리한 키에 회색 양복을 입었고 한 손에는 낡은 트렁크를 힘겹게 들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나 필자는 이내 그의 설명을 듣고 속사정을 알았다.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는 경북 포항 사람으로 그동안 자그마한 개인 사업을 하며 일개미처럼 열심이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 왔다. 갑자기 두 눈이 어두워 오더니 마침내 눈 뜬 장님이 되다시피 되고 말았다.

“아, 내가 앞을 못 보게 되다니….” 그는 나날이 잃어가는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발악하듯 몸부림을 치며 유명하다는 병원의사는 성지순례하듯 찾았다. 병원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절망에 빠져 울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 마지막으로 신불(神佛)께 기도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그는 무위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오정수(吳定洙). 필자는 오정수씨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무위사에서 기도할 것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오정수는 각오의 뜻으로 삭도로 머리칼을 밀어 버렸다. 그리고 극락보전안에 있는 후불벽화인 수월백의관음벽화 앞에서 촛불과 향화를 받들면서 백일을 기한하고 천념 염주를 헤아리며 지성으로 관음기도를 올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오정수의 간절한 기도소리는 무위사의 적막한 도량을 넘쳐 흘렀다. 죽기를 한하고 지성으로 기도하던 오정수는 백일기도가 끝나가는 즈음에 놀랍게도 두 눈이 밝아졌다고 부르짖었다.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제 확신합니다.”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오정수는 다시 트렁크를 들고 필자 앞에 섰다. 눈이 웬만하니 걱정하며 고대하는 처자에게 달려가고 싶고,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어 가장의 책무를 다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작별하는 즈음에 오정수는 호주머니에서 돈봉투를 꺼내 그동안 산사에서 체류하게 해준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부족한 돈이지만 시주금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하며 필자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필자는 빙긋 웃고 다시 그 돈을 돌려주며 기도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치하만 했을 뿐이었다. “우리 인연 있어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필자는 멀어져가는 버스 차창을 통해 오정수씨의 흔드는 손을 답례하여 마주 손을 흔들면서 내내 앞서의 신라의 향가를 생각하였다.

― 무릎꿇고 두 손 모아 관음전에 비옵나니, 천수,천안 그 중 한 눈, 눈 먼 저에게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옵시면 자비 더욱 크오리다. 무위사 수월백의관음보살님이 고해중생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고해대중이여, 우주에 의지할 성인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을 권장하오니, 우리 모두 때가 되면 이승의 인연들을 작별하면서 한과 눈물속에 홀로 머나먼 저승으로 떠나갈 때 까지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인생을 살아갑시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가 세연이 다해 육신의 탈을 벗고 어둠속에 홀로 울며 머나먼 윤회의 길을 떠나려 할 때 반드시 광명으로 나투며 현신하여 우리의 영혼을 반드시 구원해주십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를 받아 마시고
대구시 동구 덕곡동 대덕화보살님의 수기

저는 오래전부터 대장염을 앓아왔습니다. 빈혈이 심해 병원에 갔다가 궤양성대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도 몇 년간 꾸준히 다녔지만 증세는 좋아졌다간 다시 나빠지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간 치료하면 낫는다고 하는데 저는 완치가 되지않고 더 심해졌습니다. 식이요법은 물론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빈혈로 밖을 다니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모든 약을 중단하고 음식물로써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는데 몸이 그 음식을 받아주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유산을 권했습니다.
산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면서... . 그러다가 남편이 결혼 전에 가끔씩 나가던 영남불교대학에서 '좋은인연 신문'을 가지고 왔더군요.
집에서 끙끙거리는 내가 안쓰러워 뭐든지 읽을거리를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그 신문을 보다가 신행수기를 써 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로써 가피를 입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도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졸라 절을 찾았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또 지금 낳지 않으면 언제 또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몸이 더 건강해지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이상하게도 ㅇㅇ불교대학·관음사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노천법당에 서 계시는 관세음보살남을 뵙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습니다.그 러나 남편의 이런저런 이야기와 법당을 둘러보면서 오랫동안 서 있었기 때문인지 곧 어지럼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제 안색을 살핀 남편이 저를 얼른 노천법당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몸에서 힘이 좍 빠져나가고 저는 그만 남편에게 기댄 채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남편이 제 몸을 주무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봐도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언뜻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제 옆에 서계신 관세음보살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관세음보살님,관세음보살님! 아기를 낳고 싶어요.살려주세요' 관세음보살님이 곁으로 다가오시더니 제 이마를 짚어보시고는 손에 든 감로수병을 천천히 기울였습니다.

갑자기 온몸에 향기로운 감로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저는 감로수에 머리까지 다 잠겨버렸습니다. 감로수는 햇살을 받아 사방으로 무지개 빛을 뿌렸습니다. 잠시 후 관세음보살님이 다가오시더니 다시 이마에 손을 짚으셨습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이 많은 감로수를 저 혼자 다 써버려서 어떡합니까!" 관세음보살님은 환하게 웃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로수는 곧 저의 마음이니 한량없습니다. 이 온 우주,온 법계를 적시고도 수억겁 동안 흐릅니다." 저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감로수의 물결 속에서 삼배를 올렸습니다.절을 하면서도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마치 날아갈듯 했습니다.
"여보!" 남편의 절박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남편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옆에 계시던 회주스님께서 제 이마에 손을 얹고 계셨습니다. "보살님,괜찮으십니까? 구급차를 불러두었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저는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무릎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괜찮습니다.스님." "여보?" 남편이 울먹이며 저를 불렀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를 마시고 완전히 몸을 담그기까지 했어요!" 남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괜찮은지 의심스러워 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보았습니다. 정말 멀쩡했습니다.어지럽거나 구토 증세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한지 나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뛰어도 보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남편은 제가 하는 말을 믿었습니다.

대장염은 물론이고 빈혈과 그 외 합병증도 증세가 완화되어 있었습니다. 생활하는데 조금의 불편도 없었고 약을 먹지 않고도 빈혈이 차츰차츰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2주 쯤 뒤에는 현기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이까지도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후,저는 가끔 회주이신 우학스님의 꿈을 꿉니다. 한번은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면서 '출연료를 받아야겠구만'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와 우학스님의 은덕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





대원심 보살 아들의 병을 완치시켜주신 관세음보살

안성에 사는 대원심 보살은 아들이 위암말기로 진단되어 죽음을 선고받자 괴로움을 가눌 길이 없어 청룡사의 관세음보살을 찾아갔다.
이미 80세가 넘은 노보살인지라 절을 올리기 힘든 처지였다. 대원심 보살은 다만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아 관세음보살을 우러러보며 念하였다. "관세음보살님,부모가 죽은 다음 자식이 죽는 것이 이 세상의 순리이온데, 저의 업이 얼마나 중하길래 이렇게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보아야 하나이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 제발 아들을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3일 밤낮을 아들의 병이 기적처럼 쾌유되기를 기원하며 관세음보살을 찾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때 스님 한 분이 활짝 핀 연꽃 한송이를 대원심보살에게 주었다. 꿈을 꾼 것이었다.

보살은 상서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함께 치유불능이라는 진단을 했던 서울대학교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재검사결과 위암의 흔적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담당의사는 있을 수 없는 불가사의라며 매우 신기해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이 아들의 병을 완치시킨 것이었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 관음신앙. 관음기도법 김 현준저


'죽음의 길에서 다시 인간으로' (관음기도 영험담) |

1924년 7월의 '불교'지 창간호에는 '冥路(명로)에서 다시 인간'이라는 제목의 신행영험담이 수록되어있다. 이 영험담의 주인공인 원각화보살은 서울 대각사의 신도로서,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 순득을 키우며 살았다.
원각화보살은 7일에 한번씩 백용성 스님께서 설법하는 대각사 법회에 참석하였고, 평소에도 관세음보살 염불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원각화보살에게 뜻하지않은 시련이 닥쳐왔다.

금쪽같은 딸 순득이가 16세가 된 해 12월에 병을 얻은 것이다. 처음 감기처럼 시작한 병은 폐렴으로 악화되더니, 심한 기침과 고열이 계속되면서 점점 사경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종합병원에 입원을 시켰으나, 순득의 병은 낫지않았고, 명의를 찾아다니며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방법으로 수술을 해보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수술을 받는다고해도 환자의 몸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져 있어 살아나면 천행이라는 것이었다. 수술을 해야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원각화 보살은 기로에 놓이게 되었고,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위험하기가 마찬가지라면 수술을 하지않고 최선을 다해보자.

이제 내가 의지할 분이라고는 관세음보살님밖에 없다.' 원각화보살은 딸을 대각사로 업고 가서 법당 바닥에 눕혀놓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순득이가 죽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들으며서 죽게 하겠다는 각오로 관세음보살을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다. 그야말로 일념의 기도를 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이 잠들어 있던 딸이 부르짖었다. "싫어요, 가기 싫어요.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래요." 원각화보살은 딸을 급히 깨웠고, 순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꿈 이야기를 하였다. 오색찬란한 가마가 누워있는 순득이앞으로 다가오더니, 가마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내려 말씀하셨다.

"순득아, 나와 함께 이 가마를 타고 가자꾸나." "관세음보살님, 저는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해요." 순득이가 거듭거듭 고집을 부리자 관세음보살은 측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씀하셨다. "순득아, 너의 정해진 수명은 17세란다. 하지만 너의 효성이 지극하고 어머니의 신심이 돈독하니 명을 연장시켜주지 않을 수 없구나."

순득의 꿈 이야기를 들은 원각화보살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더욱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찾았고, 며칠 후 관세음보살은 원각화보살에게 현몽하엿다. "순득의 병을 완전히 고치려면 감로수를 마셔야 한다. 감로수는 삼청동 성채의 절 뒷쪽에 있는 석벽과 석벽 사이에서 솟아나오느니라."

이튿날 원각화보살은 삼청동으로 가서 하루종일 감로수를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피로에 지친 그녀는 잠시 바위위에 주저앉았고 , 바위 앞쪽으로 배어나오는 물기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급히 그곳을 파서 웅덩이를 만든 다음 고여드는 물을 떠다가 딸에게 먹였지만 효험이 없었다.

원각화 보살은 감로수를 찾기위해 매일 삼청동 뒷산으로 올라갔다. 입으로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외며 감로수를 찾아 헤맨지 일주일. 마침내 원각화보살은 북악산 정상 가까이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석벽을 찾아냈다. 맑고 정갈한 물이 분명 돌틈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원각화보살은 관세음보살께 감사드리며 그 물을 담아다가 딸에게 먹였다.

그리고, 물에 몸을 씻기기도 하였다. 10여일이 지나자 딸의 엉덩이에서 흐르던 고름이 멎었고, 얼굴에는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10여일 후 순득의 병은 완치되었다. 의사가 병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께서 고쳐준 것이다 어머니의 일념에 감응한 관세음보살께서...
출처: 관음신앙.관음기도법(김 현준저) 도서출판 효림간




가난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한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일제 말기, 논산군 논산읍 등화동에는 강태희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선대에는 한 해에 수천석을 추수하던 집안이었으나 차츰 몰락하여 산비탈의 오두막을 빌려 살 지경에 이르렀다.
집안의 몰락과 함께 모든 의욕을 상실한 강태희씨는 깊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고, 부인이 떡장수를 하여 겨우 연명하였다.

하루는 강태희씨의 집에 보명사의 자명스님이 찾아왔다. 강태희씨의 문중 산에 보명사를 짓도록 해준 것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집안사정과 병들고 지친 모습을 접한 자명스님은 간곡히 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십시오. 내 혼자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는 부처님께 의지하고 매달려 조르는 것이 제일입니다. 정성껏 기도해 보십시오." "지금 형편으로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처사님, 기도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스러운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맑은 물 한 그릇을 올리고 불보살님의 이름만 외워도 됩니다. 속는 셈치고 노는 입에 염불을 해보십시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서 기도하기 힘들면 우리 절에 찾아오십시오. 소승과 함께 염불을 하십시다."

자명스님이 간곡히 기도를 권한지 10여일이 지난 어느 날, 강태희씨는 보명사를 찾아왔고, 스님은 반갑게 맞이하여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우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십시오." 그는 스님의 지도에 따라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고, 백일 정도 지났을 무렵 관세음보살의 현몽이 있었다.

노인으로 모습을 바꾼 관세음보살이 불그스름한 물을 건네준 것이다. "마셔라." 姜泰熙씨는 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몸은 날아갈듯이 가벼워져 있었다.

그 뒤 그의 가족은 열렬한 불자가 되었고, 집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강태희씨의 부인은 떡장수를 그만두고 물감장수 행상을 하였고, 물감을 팔러다니다가 알게된 주단 포목 도매를 하는 사람으로부터 "옷감을 외상으로 줄테니 옷감장수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옷감을 떼어 시골로 다니며 파는 보따리 장수를 시작하였고,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 3년이 지나지않아 가게를 얻을 수 있을만큼의 돈을 모았으며, 운이 활짝 열려 가게를 연지 몇 년만에는 논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갑부가 되었다. 어두운 불행의 기운을 밝음으로 바꾸어 놓는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있었던 것이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간 김 현준저 관음신앙,관음기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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