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룡스님─관음신앙 체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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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드립니다.
출처/나무아미타불
안녕하세요. 저는 양양 낙산사에 다니는 불자입니다. 제가 이번에 기도하여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과거 숙생의 죄업이 산과 같이 많은 것을 느끼고 저로 인해 고통 받은 영가들을 위해 3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집에서 천수경을 한 번 읽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번씩 읽을 때마다 관세음보살님께 영가들을 극락왕생하여 주십사 3번씩 기원하였습니다. 3일째 날 회향하고 잠을 잤는데 제가 어느 절터에 있었습니다.
한 비구 스님이 아이 3명을 데리고 계셨는데 석불상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거처하는 집은 시골의 허름한 집같이 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일 작은 한 아이가 석불상을 들어서 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같이 불상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리면서 사탕을 줄터이니 불상을 깨트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잠이 깼습니다.
그 주에 저는 관세음보살님께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게 해달라고 사탕을 한 봉지 사가지고 갔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 사탕을 올리면서 간절히 영가들을 돌보아 달라고 기원하였습니다. 눈물을 너무나 많이 흘렸습니다. 천수경을 독경하면서도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저는 영가들이 아직도 천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7일 기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밤에 자기 전 한 시간씩 대비주를 외우며 다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항상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염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하였습니다. 어제 기도회향을 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 날 피곤한 일이 있어서 잠을 설쳤습니다. 새벽에 잠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바닷가였습니다. 백의관세음님이 아주 장대한 몸으로 동자 3명을 데리고 계셨습니다.
동자들을 모두 금신으로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윽고 관세음보살님이 금색초롱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동자들도 그 뒤를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며 환희스런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 번 주에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하는 뜻으로 꽃을 회향하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함에 감사드리며 무릅끊고 지심귀명례합니다.
불자님들도 항상 대우주의 자비이신 관세음보살님을 칭명하시고 염불정진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우룡 큰스님저 생활속의 관음경
[1]. 경상남도 고성군 옥천사(玉泉寺)에 담력도 크고 가끔씩 괴이한 행동을 하는 오관수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6.25사변말기에 포탄이 떨어지는 일선 쪽으로 가서 군인들을 돕는 노무자들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 속에서 동사섭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같은 노무자가 되어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모두 함께 장단을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일합시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동안에는 틀림없이 무사할 수 있습니다.
" 총알과 지뢰와 포탄 속에서 벌벌 떨고 있던 노무자들은 범상치않은 오관수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삽질을 하면서도 '관세음보살' 포탄을 나르면서도 '관세음보살'을 외쳤습니다. 이렇게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하다보니, 얼마 지나지않아 불안감이 사라졌고 두려움없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의 능률이 올랐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포탄이나 지뢰의 피해를 한 차례도 입지않았다고 합니다. 6.25사변후 오관수 스님을 진주 의곡사에서 뵙게 되었을 때, 스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체험을 했지. 그 많은 노무자들에게 어떠한 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일세. 참으로 함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공덕은 불가사의한 것이야."
[2]. 조선시대 말기에 효성(曉性)스님은 13세에 쌍계사로 출가하여 대웅전 노전 스님의 상좌가 되었습니다. 전등을 밝히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저녁 예불이 끝난 다음부터 새벽 예불 때까지 법당 안에 등불을 밝혔습니다.
둥근 그릇 모양의 등잔에 참기름을 가득 붓고 종이 심지를 달아 밤마다 불을 밝히면 3일은 쓸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법당 청소를 하다가 등잔을 살펴본 노전스님은 참기름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분명히 어제 기름을 넣었는데 왜 한 방울도 없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노전스님은 기름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살펴보니 또 기름이 없었습니다.
등잔을 살펴보았으나 깨어진 흔적은 커녕 구멍하나 없었습니다. 괴이하게 여기며 스님은 또다시 등잔에 참기름을 채웠고, 그 이튿날도 꼭같은 일이 일어나자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밤마다 등잔에 손을 대는 것이 틀림없구나.'
그날 밤 노전스님은 13세의 효성사미를 데리고 법당의 신중단 탁자 밑으로 들어가 밤을 새웠습니다. 탁자는 천으로 가리워져있어 밖에서는 그 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탁자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효성사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은사스님의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놈, 게 섰거라!" 깜짝 놀란 효성사미가 눈을 떠보니, 법당 가운데의 문 앞에 키가 9척이나 되고 검은 옷을 입었는지 검은 털이 났는지 분간이 되지않는 괴물이 서 있었습니다.
머리와 팔다리와 몸뚱이가 모두 있고 우뚝 서 있었지만, 사람은 아닌 듯했습니다. 고함을 치며 神衆壇 탁자 밑을 나간 노전스님은 그에게 앉도록 한 다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람이냐? 짐승이냐?" "사람도 짐승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목신(木神)입니다." "목신이면서 어찌 감히 부처님 전에 올리는 등잔의 기름을 훔치는 것이냐? 그 과보가 얼마나 큰 지를 모르느냐?"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냐?" "저는 이 절 밑의 화개마을 이판서댁 뒤 뜰에 서 있는 은행나무입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 발들이 땅 밖으로 나와 있는데, 무식한 머슴들이 제 발등에 나무를 올려놓고 도끼질을 해서 장작을 팹니다.
판서댁에서 겨울 내내 쓸 장작을 여러 머슴들이 계속 준비하다보니, 제 발들의 이곳 저곳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맙니다. 이 상처와 아픔을 달랠 약은 다른 곳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께 올리는 이 등잔의 기름을 발라야만 하룻밤 사이에 아픔이 사라지고 딱지가 앉습니다.
그런데, 머슴놈들이 매일 장작을 패기 때문에 며칠동안 계속 부처님의 기름을 바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네가 진짜 목신이라면 인간보다는 힘이 셀 것이 아니냐? 얼마든지 보복을 할 수 있을텐데?" "보복을 하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집의 運이 다하지 않았는지 이판서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나면 정좌를 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 번 읽습니다. 그 힘 때문에 지기(地氣)를 비롯한 어떤 기운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이판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이판서가 죽고나면 보복을 할 생각입니다."
"내가 가서 앞으로는 머슴들이 너의 발등 위에서 장작을 패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니, 보복을 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인간들이 해를 가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가 먼저 해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그렇게만 해주시면 그 이상 고마울 일이 있겠습니까?" 목신은 절을 한 다음 사라졌고, 노전스님은 날이 밝기가 바쁘게 이판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이판서는 머슴들을 불러모아 땅위로 노출된 은행나무의 뿌리를 부드러운 흙으로 덮도록 하고, 허리 높이 정도의 울타리를 만들어 누구도 나무에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상을 차려 은행나무에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뒤 쌍계사 대웅전의 등잔 기름은 훼손 당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13세의 사미 시절에 이와같은 일을 경험한 효성스님은 노년에 나를 비롯한 여러 승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수백년된 목신은 힘이 없어 보복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늙은 이판서가 날마다 외우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가피력 때문에 어떻게 보복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어떠한 사기(邪氣)도 이판서의 집안을 범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명훈가피요, '누구라도 감히 해칠 수 없다'는 관음경의 시실불감해(時悉不敢害)입니다.
[3].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매하(梅下) 최 영년(崔 永年)은 문장이 뛰어난 석학이요, 시인으로 이름난 분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늦도록 자식이 없자, 서울 자하문 밖의 옥천암 해수관음상 앞에서 삼칠일(21일)동안 생남기도를 올렸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아들을 점지하여 주시되, 재주가 비상한 문장가를 점지하여 주옵소서."
아버지는 기도 회향일 새벽에 잠깐 꿈을 꾸었는데, 점잖은 중년 부인이 양쪽 팔에 옥동자와 석동자를 안고와서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옥동자와 석동자 중에서 어느 동자를 갖기를 원하느냐?" "이왕이면 옥동자를 주십시오." "이 옥동자는 네 복에 지나치다. 석동자를 가지고 가거라. 이 석동자만하여도 그대가 원하는 재주가 비상한 문장가는 되느니라." "그러시다면 석동자를 주십시오."
마음에 섭섭하기는 하였지만 석동자를 받고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과연 그 뒤에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최 영년이며, 얼굴모습도 꿈에 받은 석동자와 꼭 닮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석동자를 받았으므로 돌처럼 병도 없고 수명 장수하리라 여겼는데, 과연 최영년은 무병장수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여 정 만조(鄭 萬朝), 여 하정(呂 荷亭) 등과 어깨를 겨룰만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만약 최 영년의 아버지가 삼칠일이 아닌 백일기도를 하였다면 옥동자를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에도 인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곧 정성을 많이 기울였으면 더 좋은 결과가 돌아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4]. 관세음보살님만이 아니라 다른 불보살님께 올리는 기도에도 반드시 기도시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기도를 하여 아들.딸이나 사위.며느리, 상좌 등을 얻게 되었을 경우, 처음부터 마음에 딱 맞는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아이구, 저런 게..'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옵니다. 이것이 불보살님의 기도시험입니다.
1) 일제강점기에 관리자에 계셨던 우련스님은 상좌가 없어서 관세음보살님께 백일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기도 회향일에 새까맣고 꼴불견인 아이가 찾아와 하는 수 없이 상좌로 맞아들였습니다.
우련스님은 그와 같은 상좌에 대해 불만이 없지않아 평소에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쯧쯧, 백일기도 회향일에 들어왔기에 할 수 없이 상좌로 삼았어.
어찌 관세음보살님께서 저런 걸 보냈을꼬?" 하지만 그 상좌가 자라 뒷날 백용성 스님의 율맥(律脈)을 이은 경하(景霞)스님이 되었으니, 우련스님의 기도가 어찌 그릇된 결과를 낳았다고 하겠습니까?
2) 관리자 관리자의 현응스님도 나반존자께 '좋은 상좌 하나 점지해주소서.'하면서 백일기도를 하여 얻게 된 상좌가 몽견선생(夢見先生)입니다.
눈만 초롱할 뿐 잘생기지 못한 이 상좌에 대해 현응스님은 만족을 하지 못하였지만, 몽견선생은 오오사카 의전을 나와 만주에 불교병원을 세워 사람들을 치료하였으며, 병원에 부처님을 모시고 많은 이들에게 염불을 권하고 불교를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기도 끝에 시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당장 눈에 딱 드는 사람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 덕으로 얻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품고서 키우고 같이 있다보면, 남보다 더 뛰어난 면이 있는 사람, 사회의 어느 한쪽을 능히 지탱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기도시험에 속지말 것을 당부 드립니다.
스스로가 행한 기도를 믿고, 또 불보살님을 믿고 기도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아들딸을 키우고 며느리와 사위를 데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속을 뿐, 불보살님은 절대로 중생을 속이는 법이 었습니다.
[5]. 몇 년전 90세 가까운 나이로 돌아가신 덕운성 보살은 50대 중반에 자궁암에 걸렸습니다. 부잣집 외동 아들인 남편이 평생을 돈 쓰는 재미로 살면서 남편이 물려받은 재산은 물론 처갓집 재산까지 모두 탕진하고 죽었으므로, 덕운성 보살은 날품팔이를 하며 혼자 1남 2녀를 키웠습니다. "말기 자궁암입니다.
앞으로 3개월정도는 살 수 있으니 주변을 정리하시지요." 대구 동산병원의 의사로부터 이 말을 들은 것은 그녀의 두 딸은 결혼을 하고 아들은 중앙대학교 전자공학과 2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자궁암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30여년 전에는 말기 자궁암이 반드시 죽는 병에 속하였기에, 덕운성 보살에게는 의사의 말이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습니다.
서울로 시집을 간 큰 딸에게 울면서 사실을 알리자, 큰 딸은 포기할 수 없다며 세브란스 병원으로 모셔가 다시 진찰을 하게 했습니다. "3달은 너무 성급한 진단입니다. 그러나 6개월 이상은 보장하기 힘듭니다.""
그녀는 의사를 붙들고 울면서 사정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를 2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제 아들이 대학 2학년이니, 졸업할 때까지만 살게 해주십시오." 의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단칸 셋방이 있는 김천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매달릴 데가 없었습니다.
오직 한 분, 관세음보살님 뿐이었습니다. 기도비가 없었던 그녀는 집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저녁은 물론이요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일기도 마지막 날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는 김천 청암사 극락암에 모셔진 42수관세음보살상(지금은 도난 당하였음)앞에서 끝도 없이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백발의 노스님 한 분이 불단 앞에 나타나 약 세 봉지를 주셨습니다.
엉겁결에 무릎으로 기어가 약봉지를 받았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먹어라." "물이 없습니다."
그러자 노스님은 부처님 앞에 놓인 다기물을 손바닥에 부어주셨고, 그 물로 한 봉지를 먹고 나자 또 물을 부어주며 말했습니다. "또 먹어라." "마저 먹어라." 세 봉지째 약을 먹었을 때 어떻게나 거슬리든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꿈을 깨고나서도 그 약 냄새는 그녀의 몸과 집안에 진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은 그녀는 말기 자궁암이 완전히 나아 아들의 대학 졸업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30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출전: 雨龍 큰스님저 생활속의 관음경(도서출판 효림)
[우룡스님의 관음신앙 체험담]
1.
8.15 해방 후,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관리자로 출가한 나는 고봉(高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강원(講院)에 들어가 경전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관리자의 어른스님들은 불교의 여러가지 공부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화두공부는 어떻게 하는건지, 주력공부는 어떤건지, 염불정진은 어떤 식으로 해야하는 것인지를 제시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옛날 스님들은 이렇게 공부하셨다, 저렇게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뿐입니다.
나는 스스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願)을 세웠습니다. '중노릇 잘 하게 해주십시오. 지혜 총명을 주시어 장애없이 경전공부를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때 나는 치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책 읽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관세음보살 염불에 몰두하였습니다.
밥 먹을 때도 '관세음보살', 화장실에서도 '관세음보살', 걸어다닐 때도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당시의 강원에서 공부를 배우는 학인은 여러가지 사중(寺中)업무를 한가지씩 맡아 돕는 급사노릇도 하였는데, 나는 관리자 산중 암자들을 돌며 공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공문서를 가지고 한 암자의 원주스님께 전하면 읽은 다음 사인을 해주었으며, 다시 다른 암자로 가서 원주스님의 사인을 맡았습니다. 2~3일에 한번씩 공문서를 들고 산내암자를 다닐 때에도 나는 오로지 관세음보살을 외웠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찾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관세음보살이 끊어지지 않는 차원에 이르렀습니다. 대화는 대화대로 잘되고, 내 가슴 속에 분명히 관세음보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염불을 시작한 지 1년 가량 지났을 무렵, 한밤중에 관리자 밑쪽에서 산불이 일어나 모든 대중이 진화작업에 나섰습니다. 특별한 소방장비가 없었으므로, 제1진이 불난 곳 가까이의 아직 불 붙지않은 풀을 낫으로 베면 제 2진이 벤 풀을 갈퀴로 끌어내고, 제3진이 괭이로 땅을 파면 제4진이 맞불을 지펴 불이 스스로 꺼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산불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나는 진화작업에 참여하였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쪽에서만 불이 못 올라오도록 맞불을 놓을 것이 아니라 불이 올라오는 뒤쪽으로 가서 진화작업을 하게되면 훨씬 빨리 끌 수 있겠다.' 그 생각과 함께 나는 큰 바위를 타고 불길 저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바위 밑쪽에서 불이 치솟아 올랐고,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엉겁결에 바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린 나는 불 속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썩은 나무에 불이 붙은 그곳은 완전히 벌겋게 탄 숯구덩이였습니다. 산불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나마저 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대중들은 크게 술렁거렸습니다.
어른 스님들의 다급한 음성도 들려 왔습니다. "저 아이가 죽다니! 불보다도 아이의 시신부터 건져야 한다." 하지만 불구덩이 속을 구르다가 일어선 나는 소리쳤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불 끄세요. 저는 여기서 불을 끌게요.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대중스님들은 그 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죽었거나 큰 화상을 입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 나는 다친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팔의 살결이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대중들은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기적이다. 불보살님의 가피야." 그 때 나는 확신을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어떤 액난도 고난도 사라지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할 수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2.
그리고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 관리자에 빨치산이 들어왔습니다. 빨치산 사령관 유 성균이 4백여명의 대원을 이끌고와서 꼭 한달동안 관리자를 점령했습니다. 당시 관리자에는 학인스님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빨치산들은 관리자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신상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자네는 집에 간다지? 오늘밤 우리 짐을 옮기는데 도와줘야겠어." 그들은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붙들어 갔습니다. 그 때 나는 지금의 관음전 큰 방에 동료들 7~8명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빨치산이 그들을 다 붙잡아 갔지만 나에게는 가자는 말도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 잡혀간 큰 방에 홀로 우두커니 있을 때에도 빨치산들이 여러차례 문을 열고 기웃기웃하였지만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당시에 잡혀간 사람들은 빨치산들과 함께 생활하며 모진 고생을 하였으며, 그 중 반이상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빨치산의 눈에 보이지조차 않아 잡혀가지 않았을 뿐더러, 꾸준히 공부를 잘 할 수 있었으니...
어찌 이것이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 곧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아니겠습니까? 내 나이 20세 이전에 체험한 이 두가지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누구든지 관세음보살을 念하면 모든 두려움.재난.불행에서 벗어나 願과 같이 살 수있게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이 觀音經을 읽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불자님들께 진정으로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겠다고 작정하였으면 한 경지에 오를 때까지 꾸준히 해 나가십시오.
그 한 경지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나의 가슴 속에서 관세음보살 염불이 계속 이어지는 단계입니다. 대화는 대화대로 잘 되고 관세음보살 염불이 쉬임없이 또렷하게 이어지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재난이 스스로 피해가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뜻하는 바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독히하면 백일, 길어도 3년을 작정하면 이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으니 부디 부지런히 염불해 보십시오.
대자비의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하는 우리또한 대자비의 무궁한 힘을 지닐 수 있게되며, 주위를 평화롭고 아름답게 바꿀 수 있게됩니다.
그 날까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생각하고 함께하여 크나큰 행복을 이루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도서출판 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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